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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4:1-4는 하나님이 앉아 계신 보좌와 그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방에 대해 묘사한다. 그 보좌에 앉으신 이를 표현하고자 하나 이 역시 인간이 눈으로는 볼 수 없기에 보석으로 그리고 주변을 둘러 싼 무지개와 이십 사 장로들만을 간접적적으로 언급한다. 드디어 5절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하나 이번에도 역시 번개와 굉음들과 뇌성, 그리고 일곱 영이 말해진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자신이 목도한 하나님과 그 보좌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에 실패하자  계 4:6-11에서 그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 궁전(창궁, celestial palace, 蒼宮)을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 시도에 동원된 용어들은 궁창(raquia, firmament, 하늘) 위의 물(창 1:7) - 요한은 이를 '유리 바다'라고 칭한다 -과 '네 생물'이다.

이는 로제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설명하기를,

"사람들은 하나님이 물 위에 궁전을 지으셨다고 생각했다(시 104:3; 148:4; 레위의 유언 2; 슬라브어 에녹서 3:3).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궁창 위에서 쉬신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고대의 신화를 이어받아 그 나름대로 새롭게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유리 바다와 같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보좌 앞을 묘사하는 데 그리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내부 영역에는 네 생물이 있고 외부 영역에는 이십 사 장로가 서 있다. ... (중략) ...

이 네 생물도 마찬가지로 고대 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런 신화적인 배경에 따르면 이 생물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형성하는 궁창(穹蒼, 하늘, 돔 형태로 펼쳐 놓은 것)을 받치는 중요한 네 형상으로 간주된다. 네 명의 강력한 천사들, 다시 말하면 커다란 네 궁좌(별자리)들이 하늘 끝에 서 있다. 바빌론의 점성학에 따르면 사 계절을 이끄는 네 궁좌가 나온다. 4월의 황소자리(봄), 7월의 사자자리(여름), 사람의 얼굴, 즉 전갈 인간으로 묘사되는 10월의 전갈자리(가을), 그리고 독수리와 유사한 1월의 수병자리(겨울). 그래서 요한계씨록의 네 생물은 고대 점성신화의 내용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이 점성신화적인 내용들은 요한계시록에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네 생물들은 이사야 6장 2절에 나오는 스랍들과 동일시되는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 로제, 요한계시록, pp. 80-82.

 

그렇다면 유리 바다의 표현이 궁창 위의 물이라는 고대의 신화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고, 네 생물 역시 바빌론의 점성학으로 그 기원이 올라가지만 계시록에서는 더 이상 그 본래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이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인간의 지식과의 연계를 통해 창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제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들은 성서적인 표현을 통해 묘사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최근의 언론 기사를 보면 크리스마스 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한 별이 현대의 천문학에서 보면 목성과 토성이 근접해 보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연합뉴스의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검은 도화지 위에 하얀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두개의 별이 밤하늘을 밝게 비춥니다.
거리가 가까워 마치 하나의 행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태양계에서 가장 거대한 행성인 목성과 아름다운 띠를 지닌 토성이 빚어낸 우주쇼입니다.
두 별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다가 약 20년에 한 번씩 만나는데, 20년마다 겹쳐보이지는 않습니다. 목성과 토성이 마치 하나의 별처럼 보이는 이른바 '대접근'은 쉽게 볼 수 없는 현상인데, 이렇게 가까이 만난 두 행성을 인류가 볼 수 있게 된 건 800년 만입니다.
400년 전에도 두 별이 가깝게 만났지만, 당시엔 관측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재일 / 과천과학관 천문학 박사> "1623년 당시에는 목성과 토성이 태양과 너무 가까워서 관측이 안 됐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관측이 된 걸 기준으로 하면 1226년 이후로 가장 가까이 관측이 되는 겁니다."

두 별의 만남은 20년마다 이뤄지지만 이번 재회는 성탄절을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탄생한 아기 예수를 만나러 길을 떠난 동방박사들을 이끈 것이 바로 목성과 토성이 함께 만들어낸 밝은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선 성경에 나오는 별이 당시 목성과 토성, 혹은 목성과 금성의 근접 현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성경과 복음의 설명과 전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야 한다. 1세기의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하늘 궁전의 모습을 그저 본 대로 전달하기만 해도 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록 요한계시록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들의 지식과 인식의 틀에 빗대어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설명의 근간으로는 성서적 표현을 고수했다. 다시 말하면 동시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결론은 성서적 표현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를 부르셔서 사도 요한처럼 하늘의 일과 모습을 보여주실 가능성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경험을 한 어느 누구는 당연히 이를 알리려 할 것이다. 그때 그는 지금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과 지식을 동원하여 설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설명의 근간은 여전히 성서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적인 표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계시록 4:8-11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11절에 기록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라는 고백이다. 우주 물리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우주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러한 발견들은 성서적 표현에 맞추어 설명되고 전달되어야 하지, 성경의 내용이 우주 과학적 발견에 비추어 수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실 때 목성과 토성이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한 것이 당시의 지식체계에서는 왕으로 오신 이를 가리키는 한 별로 설명되어 복음서에 기록되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작정하시고 행하신 사랑의 일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별을 보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분께 경배하는 것이다. 공학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천문학적 내용이 발견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가능케 해주신 하나님께 여전히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켜 주시고 더욱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심을 감사해야 한다. 2000년 전에 나타난 한 별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었듯이 전세계가 어려운 지금 나타난 목성과 토성의 크리스마스 별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것은 너무나 당연하므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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