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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쓰레스는 계시록 4장 1절을 설명하면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방으로 인도되는 모습을 마치 공항의 관제탑으로 안내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그(요한)의 이상을 통하여 온 우주의 관제탑으로 옮김 받는다. 우리는 통제자 하나님과 그의 계획들을 이해할 때 이 관점에서 사건들이 연결되는 것을 본다. 비록 이것들이 때로는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통달하시는 자를 안다. 그의 계획들은 실패할 수도 없고 실패하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유혹이나 핍박에 에워싸였을 때 그의 성품과 영광의 계시는 최상의 치유책"이라고 말하면서 요한계시록에 4장의 하나님의 방에 대한 서술 목적 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긴급한 처방과 회복을 위한 치유의 방편이다.
그러면서 "계시록은 하나님과 그의 위대함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역사와 영적인 충돌에 대한 비밀들은 하나님 자신에게 중심을 둔다. 온 우주는 그의 영광(21:22-23), 그 의 선하심(22:1-5)과 그의 찬양(5:13)으로 충만하기로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 과정은 여기에 축소판으로 계시된다"고 한다.
- 포이쓰레스, 요한계시록 맥잡기 p. 103-4.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주권에 대해, 또한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에 대해서 온 우주의 파노라마를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처방으로 계시록 4장과 5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파노라마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모든 시험과 싸움에서 승리하여 벗어날 수 있는 전략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을 한번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그 한 번의 체험이, 성령의 역사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를 굳건히 붙잡는 밧줄이 된다. 그러기에 4장과 5장에 묘사된 모든 장면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영광과 통치의 모습으로 연결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장엄함에 취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계시와 예언들을 듣는 그대로, 비록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믿음의 자세가 요구된다.
이제 각각의 말씀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4
1 Μετὰ ταῦτα εἶδον, καὶ ἰδοὺ θύρα ἠνεῳγμένη ἐν τῷ οὐρανῷ, καὶ ἡ φωνὴ ἡ πρώτη ἣν ἤκουσα ὡς σάλπιγγος λαλούσης μετʼ ἐμοῦ λέγων· ἀνάβα ὧδε, καὶ δείξω σοι ἃ δεῖ γενέσθαι μετὰ ταῦτα.
이 일들 후에 내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보십시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전에 내가 듣기에 트럼펫 같았던 나와 함께 말했던 그 음성이 말하기를 여기로 올라오라 그러면 이 일들 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했습니다.
θύρα ἠνεῳγμένη ἐν τῷ οὐρανῷ 에서 ἠνεῳγμένη 는 ἀνοίγω (열다) 의 수동형완료분사이다. 요한은 그 문이 열리는 것, 즉 닫혀 있다가 열리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이미 열린 상태로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하늘로 들어 올리시기로 이미 작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1세기 이후의 성도들과 함께 마지막 때를 사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방을 보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7:56 에서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ἰδοὺ θεωρῶ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διηνοιγμένους)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했을 때 διηνοιγμένους 역시 διανοίγω (찢다, 열다) 의 수동형완료분사이다. 여기서 열려 있는 것은 하늘들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이며 문과는 달리 찢어진 듯이 열려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2 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늘에 올라간 것을 말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그는 셋째 하늘에까지 (ἕως τρίτου οὐρανοῦ) 올라갔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본문과 비교하여 일부 주석가는 요한은 사도 바울이 말한 삼층천과는 달리 하나의 하늘을 말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본 문은 (θύρα) 여러 하늘 중 마지막 하늘에 열려 있는 문이므로 그 하늘은 단수로 표시됨이 당연하다. 고후 12:2 의 셋째 하늘 (τρίτου οὐρανοῦ) 역시 단수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이에 반하여 스데반은 지상에서 곧장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인자(그리스도)를 보았으므로 그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여러 하늘들이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찢어진 듯이 열려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 주실 때, 순교한 성도를 친히 맞아 주실 때, 그리고 에녹과 엘리야처럼 산 몸으로 승천할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일들은 모두 성령이라는 하나님의 이동 수단 안에서 이루어진다.
1절의 마지막 부분인 ἃ δεῖ γενέσθαι 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계시하실 일들의 성격은 필수적이고 따라서 회피불가한 일이라는 어감을 준다. 성도들 역시 통과해야 하고 승리해야 할 일들이다.
2 Εὐθέως 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ἰδοὺ θρόνος ἔκειτο ἐν τῷ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ὸν θρόνον καθήμενος,
그 즉시 나는 성령 안에 있게 되었고, 그리고 보십시오! 하늘에 보좌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는 한 분이 좌정하고 계셨습니다.
3 καὶ ὁ καθήμενος ὅμοιος ὁράσει λίθῳ ἰάσπιδι καὶ σαρδίῳ, καὶ ἶρις κυκλόθεν τοῦ θρόνου ὅμοιος ὁράσει σμαραγδίνῳ.
그리고 좌정하신 분은 그 모습이 벽옥과 루비 같았습니다. 그리고 에머랄드 같은 모습의 무지개가 그 보좌를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 역시 하나님의 이동 수단에 탑승한다. 순식간에 그는 마지막 하늘로 올라갔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뵙게 된다. 그러나 그 분의 묘사는 그저 보좌에 앉으신 한 분이다. 2-3절은 하나님의 용모 또는 신체적 묘사를 기대하는 자에게는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런 인간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묘사는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 모습이 벽옥과 루비 같다고만 한다.
단 7:9-10 에 보면 다니엘 역시 하나님의 묘사에서 보좌를 먼저 말한다.
9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하나님은 먼저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설명된다. 그 보좌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보좌에 이를 수 없다. 그 보좌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앉아 계신다. 그러나 그 보좌 옆에 주님께서 함께 앉아 계시며 성도들에게도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심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딤전 6:15-16에서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것을 볼 수 있다.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모습이 보석과 같이 묘사된 이유는 인간은 다가갈 수 없는 빛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 빛이 때론 꺼지지 않는 불꽃 같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도 없다. 세계 곳곳에는 일부 사람들이 자신이 본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하는 책이나 간증이 다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서 모든 교회 공동체에 권장할 것은 못된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서 조금도 더하거나 감하지 않을 뿐이다.
루비와 백옥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그 붉은 빛과 투명한 빛으로 인해 우리에게 심판과 거룩함의 이미지를 자극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자극일뿐이며 결코 그러한 이미지 안에 제한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해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이며 고정된 것이라고 단정하지 못한다.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묘사를 다 합한다 하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보좌를 둘러싼 에머랄드 빛의 무지개는 노아의 무지개 언약을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이 또한 우리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구속을 자극하며 이로 인해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릴 이유를 제공한다.
4 Καὶ κυκλόθεν τοῦ θρόνου θρόνους εἴκοσι τέσσαρες, καὶ ἐπὶ τοὺς θρόνους εἴκοσι τέσσαρας πρεσβυτέρους καθημένους περιβεβλημένους ἐν ἱματίοις λευκοῖς καὶ ἐπὶ τὰς κεφαλὰς αὐτῶν στεφάνους χρυσοῦς.
또한 보좌를 둘러 싼 24개의 보좌들이 있었는데, 그 보좌들에는 24명의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금관을 머리에 쓰고 앉아 있었습니다.
24 장로가 입고 있는 흰 옷과 금관은 계시록 2-3장에서 주님께서 하신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당연히 24 장로는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며 승리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 믿음의 증인들이다. 하지만 24 장로들이 영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정확한 것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이러한 것의 탐구는 현재 사용가능한 자료들로부터 그저 거울로 보듯이 추측만 할 뿐이다.
Nestle, Eberhard, Erwin Nestle, Barbara Aland, et al. 1993
The Greek New Testament. 27th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이상에서 살펴 본 4장 2-4절은 한 장의 해상도 높은 사진이다. 아니면 4K 영상의 한 스틸이다. 그 스틸에서 보이는 것은 보좌, 좌정하신 분, 벽옥, 루비, 에머랄드, 무지개, 24 보좌, 24 장로, 흰 옷, 그리고 금관이다. 이 모든 셋팅이 한 순간 우리의 망막에 순식간에 들어온다. 이와 같은 이미지가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1절과 2-4절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καὶ ἰδοὺ 이다. 1절은 요한이 지상에 있으면서 깜짝 놀랐다. 하늘에 열린 문이 보이고 주님의 음성이 말씀하시기에 놀란 것이다. 그 음성을 듣는 즉시 그는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 갔고 그리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다.
사도 요한은 독자들에게도 깜짝 놀라기를 요구한다. 그 어감이 καὶ ἰδοὺ 이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벽옥은 무엇을 의미하고 루비는 또 무엇이며 24장로가 입고 있는 흰 옷은 무엇을 상징하며 쓰고 있는 금관은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생각할 여유를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쓴 24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1세기의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이러한 규모와 모습은 지상에서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웅장함과 영화로움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지엄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면서 지구 상에서의 과학 기술과 태양계 및 우주에 대한 지식의 진보로 인해, 이전에는 황당하다고 여겼을 성경의 표현들에 대해서 조금씩 그 이해의 폭을 넓혀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무선 통신의 발전으로 인해 시신경에 의한 착시로만 여겼던 환상, 그러니까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영상을 이제는 아무런 의심없이 우리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연주하는 음악 소리도 마치 바로 옆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크고 분명하게 듣고 있다. 중강현실을 통해 먼 곳에서 보내는 스트리밍 영상에 맞춰 함께 움직이고 춤추고 하지 않는가? 사도 요한이 때때로 자신의 환상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보고 묘사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 우주에는 온통 다이아몬드 투성이인 행성의 존재도 우리는 천문학자들의 분석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1세기의 독자들과는 달리 4:2-4에 등장하는 보석들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지배권을 상징한다는 식의 이해를 하지 않아도 된다. 1 실제로 그런 보석들로 이루어진 곳을 지금 사도 요한은 방문한 것이다. 모든 것은 사도 요한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고 그가 기록한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기록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이 좌정하신 보좌는 바로 그런 모습이다. 더 이상 우리는 구약의 하늘 보좌를 묘사한 부분들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2
결국 이 부분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 실제로 본 것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모습 그대로는 우주 여행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로 성령의 보호 속에 성령이 운행하시는 이동 수단을 통해 하늘로 순식간에 이동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인간의 지식이 더욱 확장되고 발전할수록 그 폭과 내용이 심화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그것을 넘어서는(μετὰ) 것에 대해서는 겸손히 모든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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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에 지상의 왕이 국제적인 무역을 통하지 않고 보석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참고. 겔 28:13). 그러므로 이러한 보석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국제적인 범위를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 포이쓰레스 p. 107.
2. 이 부분에 대해 포이쓰레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에서 성막(출 25-40장)과 성전(왕상 5-7장: 대하 2-4장)은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의 형상이나 그림자이다(출 25:40; 히 8:5-6; 9:1-14). 요한은 지상에 있는 복사판보다는 천상에 있는 원본을 본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성전(3:12; 7:15; 11:19; 14:15, 17; 15:5-l6:l; 16:17; 21:22)과 성전 안에 있는 요소들, 예를 들면 촛대(4:5; 참고. 1:12), 그룹 천사와 같은 생물들(4:6-9), 향과 기도(5:8), 구약에서 레위 지파 계통의 노래하는 자들이 드리는 것과 같은 찬양의 노래들(4:8, 11; 5:9-13; 대상 16장), 희생 제사(5:6, 9), 언약궤(11:19), 제단(11:1)과 바깥 뜰(11:2)에 대한 적절한 언급을 많이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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