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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세대주의 (경륜의 시대) 와 역사적 해석
종교개혁 이후에도 미래주의적인 해석은 여전히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세계의 역사를 여러 다른 시기 혹은 “경륜의 시대(세대)”로 나누었던 사람들 중에서 그러했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시대를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 두고자 시도했다. 역사에 관한 좀 더 낙관적인 견해를 지닌 세대주의자들은 후천년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천년왕국의 이상이 선교적 수고와 사회 개혁을 통해 실현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이후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전에 대한 높은 희망을 지닌 이러한 접근법은 미국 공화국 초기에 널리 퍼졌다.14
역사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지닌 자들은 전천년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은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악을 물리치시고 왕국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지구상의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러한 접근법의 여러 변형들이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집단 내에서 발견되는데 가장 널리 영향을 미쳤던 형태는 존 넬슨 다비 (1882년 사망)에 의해 1829년 무렵에 발전한 플리머스 형제단이다. 다비의 견해는 ‘스코필드 참조 성경’에 의해 인기를 얻었으며 또한 (존더반 출판사가 발행한) 할 린세이의 베스트 셀러인 위대한 혹성 지구의 후기 (The Late Great Planet Earth) 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 책에는 심지어 아마겟돈 전쟁의 군대 이동을 예측하는 지도까지 포함되었다.
이 체계에는 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함께 엮여 있다. 다니엘서 9장에는 칠십 이레의 기간이 (한 “이레” = 7년)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 역사의 마지막 연도들이라고 이해된다. 다비의 인식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시간 이전에 오직 한 이레만 남고 모든 이레의 기간들은 (69 이레) 다 지나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성전이 주후 70년에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농구 경기의 심판이 시계에 남은 몇 초 내에 경기를 종료시키듯 한 이레의 기간 동안만 역사가 진행되도록 하셨다.
시계가 다시 시작될 신호는 “휴거”로서 이때 그리스도는 신실한 자들을 공중으로 그분을 만나도록 끌어올리시고 (살전 4:16-17; 마 24:40-41) 그곳에서 계시록 6-19장과 다른 곳에서 묘사된 마지막 환난의 기간을 보내도록 남겨두신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짐승”과 “음녀”가 포함되는데 이들은 UN과 로마 카톨릭 교회 혹은 WCC (세계교회협의회)와 동일시된다. 아마겟돈 전쟁은 이스라엘 동쪽의 거대한 군대와 (계 16:12-16, 흔히 중국과 동일시됨) 이스라엘 북쪽의 세력인 곡이 (겔 38-39장, 보통 러시아와 동일시됨) 개입하게 된다. 이 전투 후에 그리스도는 지구 상의 천년왕국으로 인도하며, 그 후 사탄이 놓여 나게 되고, 최후의 심판과 영생이 뒤따른다. (계 20-21장)
이러한 접근법의 문제점들은 매우 많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a) 이러한 체계에는 다양한 성경의 책들이 발췌되어 함께 엮여 있으며 많은 부분들이 억지로 갖다 붙인 방식으로 해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다비의 체계는 하나님께서 시간이 다니엘서 9:26을 통하여 경과되도록 허용하시고, 그리고 나서 2000년 이상 동안 9:27의 말씀이 성취되지 않은 채로 시계를 멈추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 읽게 되면 이 두 구절은 같은 시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비록 다니엘서나 계시록이 “휴거”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이 체계의 지지자들은 밧모 섬에서의 사도 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소환: 이리로 올라오라 (계4:1) 에서 휴거를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문맥에서 읽으면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 요한을 일시적인 환상 속의 승천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모든 신실한 자들의 모임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체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 5-19장에 묘사된 환난에서 면제되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교회”라는 단어가 이 장들에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들은 “거룩한 성도들”이 (계 13:7, 10; 17:6) 겪는 고난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고,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는 오직 환난이 시작된 이후에 회심한 그리스도인들만 포함된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b) 이 체계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전혀 생소한 예언의 기계적인 성취관을 가지고 있다. 구약 성경이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언급되지만 그러나 결코 그대로 인용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비의 계산은 단어 문구에 의존할 뿐 아니라 다니엘서 9:25의 KJV와 NIV 역본에서 찾을 수 있는 구두점에도 의존한다; 그의 인식은 NAB, TEV, NRS, 그리고 다른 역본들에서 사용된 구두점에서는 무너진다.15 구약 성경의 예언들은 요한계시록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들을 성취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짜여 있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실 것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c) 다비의 체계는 이 책의 서문을 문자적으로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는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계 1:4).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회중에게 보내진 서신이다. 계시록 2-3장은 환상들이 읽혀져야 할 문맥을 제공하는 그 일곱 교회들의 상황에 대해 광범위한 설명을 주고 있다. 어떤 곳에도 그 일곱 교회를, 스코필드 참조 성경에서 하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는 1세기의 전체 교회를 나타내고, 서머나 교회는 주후 100-316년의 박해 받던 교회를 대표하며, 버가모 교회는 중세의 교회를 나타낸다고 하는 식의 알레고리로 해석할 만한 단서를 제공하는 텍스트는 없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이고, 그것은 실제 회중들“에게” (예를 들면 살전 1:1; 고전 1:2; 롬1:7) 보내진 다른 신약성경의 서신들처럼 읽혀야 한다.
미래주의적인 해석의 과도함은 요한계시록을 그 역사적 문맥에서 읽을 때 흥미의 증진에 기여한다. 16세기와 17세기에 프로테스탄트의 석의의 반교황적인 적대감에 대항하려는 예수회 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경향이 만들어졌지만, 역사적 접근법은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서 표준이 되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이 고대에 널리 유행했고, 에녹 1서와 에즈라 4서, 모세의 성약 및 기타 텍스트와 같은 글들을 포함하고 있는 묵시문학의 장르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 고대 본문과 비교하면 요한계시록은 덜 독특하고 덜 밀교적인 것처럼 보인다. 문맥에 대한 관심은 상징주의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죽임을 당하면서도 살았던 짐승은 네로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네로는 아직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살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신비한 숫자 666은 "네로 시저"라는 이름의 수치 값이다. 최근 요한계시록에 대한 입장은 황제의 (강압적) 요구에 직면하고, 지역의 유대교 회당과의 마찰을 겪으며, 소아시아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무리와 경쟁해야 했던 복잡한 사회적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환상으로 말하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
역사적 해석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은 억제하지만 독자들을 본문에서 텍스트가 가지는 힘(능력)을 제거함으로써 텍스트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이 본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로마 제국에 대한 질문들이 우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14See the article by Nancy Koester, “The Future in Our Past: Post-millennialism in American Protestantism,” 137-144 in this issue.
15Dan 9:25 refers to seven weeks of years (= 49 years) and sixty-two weeks of years (= 434 years), a total of 483 years. The King James and New International versions say that all 483 years elapse between the command to rebuild the wall of Jerusalem and the coming of the anointed one, Jesus. The New Revised Standard and most other recent translations say that an anointed one is to appear after a mere forty-nine years, that is, shortly after the exile. Thus this anointed figure would be Joshua or Zerubabbel (Ezra 3:2) or perhaps Cyrus (Isa 45:1). The remaining period of 434 years is roughly the period from the rebuilding of Jerusalem to the Seleucid persecution in the second century B.C., the time most scholars think Daniel was wri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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