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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5분 말씀

맹인 바디매오와 부자 청년, 막 10:46-52; 10:17-22

by 구봉환 2021. 2. 26.

 

마가복음 10장에는 많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바로 전입니다. 주님은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 19:1) 그리고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예정이었습니다. 아직 여리고에 이르기 전에 한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나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누가는 부자 관원이라고 했고 마가는 그냥 부자라고 했으며 마태는 부자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며 관리였던 것입니다.

 

마태는 그의 질문을 이렇게 전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6-17)

 

마가의 기록은 좀 더 많은 정보를 줍니다. 먼저 이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진 장소가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호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꿇어앉아서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은 조금 다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7-18)

그리고 주님이 이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21절) 아마 어려서부터 그가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계명들을 다 지킨 겁니다. (요일 2:3)

 

누가의 기록은 마가와 같으나 이 사람이 관리이고 큰 부자라는 사실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눅 18:18, 23)

 

그 후의 이야기는 대동소이합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그를 사랑하사 하신 말씀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 19:21; 막 10:21; 눅 18:22)

이 사람은 실망하고 근심하여 떠나갑니다. 그리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주님이 말합니다.

 

그 후에 여리고로 가까이 가시는 주님에게 소경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그는 주님께 큰 소리로 외칩니다. (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마태는 두 맹인이라고 했고 마가와 누가는 한 맹인이라고 했으며 마가만이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라고 합니다.

 

바디매오(와 다른 한 맹인)는 주님께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외칩니다.

그들의 간절한 외침이 예수께 닿았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들)의 대답은 "보기를 원합니다!"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일원으로 마지막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두 사람을 이 이야기는 소개합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후에는 더 이상 제자로 받아들일 기회가 없으므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 당시 주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중에는 아마도 사도행전 1장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기도 용사에 포함되었던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마 바디매오도 그 다락방에 있었을 겁니다.

 

프란스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만난 마지막 합류자일 가능성이 있는 자는 존경받는 부자였다 (10:17-22), 그러나 그는 예수의 측근으로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지금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회가 받아들이는 경우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맹인 거지이다. 그가 바로 부자 대신 예수를 길에서 만나 시력이 회복되고 주님을 따르도록 받아들여진 사람이다. 반면에 부자는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눈먼 채로' 예수를 떠나갔다. (10:22) 

이 사람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팔 것도 없어서 그의 헌신은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았었다. 우리가 그의 제자로서의 이어지는 행적에 대해 아무 것도 듣지는 못하지만 마가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제자들의 무리에서 친숙한 인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주1) 

 

우리는 이 부자 청년과 바디매오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청년은 주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청년은 주님을 그저 선한 한 명의 종교적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 즉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나올 때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예의를 갖추어 무릎을 꿇고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진지했으며 격식과 품위가 넘쳤습니다. 보는 이들은 다 그에게 존경심을 느꼈을 겁니다.

 

바디매오는 사력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보지 못하므로 자신의 음성이 주님께 닿는 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소리치자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를 업신여기며 조롱했을 겁니다. 그의 외침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니?"

"보기를 원합니다."

 

바디매오의 이 대답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을 겁니다. 그의 부탁은 고상하지도 않았고 종교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격식을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과 아픔을 드러내면서 고쳐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을 겁니다. "그럼 그렇지. 맹인이 눈이나 뜨면 됐지."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눈이 떠진 그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제자로 받아 주신 겁니다. 부자 청년이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영생을 바디메오는 얻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에게 주님을 따르지 못할 아무런 문제나 이유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환경에서 주님을 따르지 못할 이유나 장애물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가면서 부자 청년처럼 격식과 예의를 차리면서 나갑니까? 아니면 그저 주님이 말씀만 하시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부족함과 아픔을 큰 소리로 외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압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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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last potential recruit we met was an admirable, respectable, and wealthy man (10:17–22), but to the disciples’ consternation he has not been welcomed into Jesus’ entourage. Now we meet a man at quite the other end of the scale of social acceptability, a blind beggar. And it is he, rather than the rich man, who will end up following Jesus ἐν τῇ ὁδῷ, with his sight restored, whereas the rich man has gone away ‘blind’. This man has nothing to lose, nothing to sell, and so his commitment can be immediate and complete. While we hear nothing of his subsequent discipleship, the fact that Mark records his name and his father’s name suggests that he became a familiar character in the disciple group.
- France, R. T. (2002).  The Gospel of Mark: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