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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

구봉환 2020. 10. 1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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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

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 2005년 3월호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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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 - 2005년 3월호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맨 끝에 놓이게 된 것은 정경성에 의심이 있고 다른 성경들에 비해 중요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후기에 기록되어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용상 ‘계시사적 진전(progress of redemptive history)의 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또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통해 잘못된 종말론적 시각을 교정할 수도 있다. 종말은 단순히 역사의 끝 혹은 시간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옛 세상’(old Age)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Age to come)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종말론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변화(Paradigm Shift)가 일어나고 있는데, 남아공의 쾨니히(Adore K?nig)나 미국의 빌(G. K. Beale) 같은 학자들이 종말을 ‘시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황창기 교수가 이것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개혁주의 종말론은 소위 ‘시종일관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과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통합한 ‘이미’와 ‘아직’(already … but not yet)의 구조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보스(G. Vos)는 메시야의 도래로 옛 시대가 단번에 끝날 것이라는 구약의 수직적 종말론 구조가 바울에게서 ‘이미’와 ‘아직’의 구조로 변형되여 원칙적으로 ‘이 세상’ (this Age)은 끝나지만, 마지막 날에 주님의 재림으로 이미 도래한  ‘오는 세상’ (Age to come)이 온전히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때까지 중첩된 시간 안에 살고 있는 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와 ‘아직’ 구조의 약점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not yet)를 너무 넓게 잡아서 신약에서의 임박한 종말론을 가리키는 구절들도 모두 역사 끝에 일어날 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마 10:23, 16:28, 마 24-25장의 감람산 강화 등).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상징적으로 보거나 문자적으로 보되, ‘재림의 연기’라는 잘못된 주장을 펴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이런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다. 1장 1절에 “(계시록을)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했고, 1장 3절에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다. 1장 7절에서 “(예수님)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라고 했고, 심지어 22장 20절에선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신다(cf. 계 2:25, 3:10, 11, 12:5, 18:24, 22:6, 7, 10, 12). 요한계시록은 종말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종말에 대한 자세한 것은 스프로울(R.C. Sproul)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좋은 씨앗, 1998)을 참고하면 더욱 좋다.

 

한편 우리는 ‘옛 언약(세상)의 끝’과 ‘새로운 언약(세상)의 시작’ 사이에 언약의 중첩(고전 10:11, the ends of the world)이라는 구도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사도행전과 짝을 이루는 책으로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세상이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옛 세상이 점진적으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3절에서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역설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천사를 판단, 심판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다. 하지만 천사가 판단, 심판하는 것은 옛 세상이다. 요한계시록은 천사가 심판의 주체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심판하는 세상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 된다. 즉 요한계시록은 옛 언약에 속한 세상인 유대주의의 끝, 심판을 말하며 이것은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첫 독자들은 유대주의자와 로마 제국에 의해 이중으로 박해를 받고 있던 성도들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상징적인 언어로 기록하고 있지만, 첫 독자들은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2세기 이후 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를 잘 요약해 주고 있는 스웨테(H. B. Swete)의 글을 기초로 살펴보기로 하자(H. Barclay Swete, Commentary on Revelation, pp.ccvii-ccxix.). 이런 해석사 연구를 통해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해석법들의 실체가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다.

 

교부 시대(1-4세기)

 

성경을 통해 계시된 기독교적 불변의 진리가 사도 시대 이후 기독교 안에 나름대로 정착된 시기가 있었다. 그때를 소위 속(續) 사도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변증가들이 뒤를 이어갔다. 그들을 통틀어 일반적으로 교부(敎父)라고 부른다. 교부들은 말뿐 아니라 글로써 자신들이 직면한 외적 박해와 내적 이단에 대항해 변증적이고 논쟁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박해의 기간 중에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천년왕국에 관한 두 가지 질문이었다. 즉 처음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문제는 주로 적그리스도의 정체와 천년왕국의 도래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저스틴(Justin Martyr, †165)은 천년왕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대한 증거로 요한계시록 20장을 사용한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 가운데 생존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한 사람인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받은 계시 가운데 예언하기를,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천년을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Dial. lxxxi. 15.). 그는 문자적 천년왕국을 믿었다.

 

또 이레니우스(Irenaeus ca. 180)는 요한계시록을 자주 인용했는데, 21장을 지상적 왕국과 회복된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의 근거로 삼았다(Haer, v.35. 2). 그는 사도 요한의 ‘짐승’과 사도 바울의 ‘불법의 사람’을 동일시하고, ‘적그리스도’를 ‘당시의 국가’로 보았다(Haer, v.28. 3, 30). 또 17장의 ‘열 뿔’을 로마 제국이 ‘열 왕국’으로 나눠지는 것으로, 바벨론과 로마가 잿더미로 변할 것이라고 추측했다(Haer, v.26. 1). 아마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영적 구원의 개념을 반박하기 위해 강조되었을 것이다.

 

한편 히폴리투스(Hippolytus, ca. 200)는 자신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에 대하여」라는 소책자를 통해 이레니우스의 해석에서 몇 단계 더 나아간다. ‘첫째 짐승’은 ‘로마 제국’인데, 이는 ‘상처를 입고 죽었다가 적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둘째 짐승’은 로마 제국에서 일어나게 될 ‘열 왕국’이고 ‘아이를 낳은 여자’는 ‘교회’이며, ‘바벨론’은 ‘로마’이고 ‘두 증인’은 재림의 선구자로 나타날 ‘에녹과 엘리야’라고 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2세기 초의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로마로 보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20장에 근거해 천년왕국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첫 독자들은 적그리스도를 유대주의자로 보았으나, 그들(2세기 초의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유대주의자로 보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미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유대주의에 대한 심판이 이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 이후 유대주의에서 로마에 대한 심판으로 전환되는데, 따라서 AD 70년 이후 교부들은 적그리스도를 로 마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 강점기에 길선주 목사는 그의 '말세학'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적그리스도로 보았다. 하지만 해방이 된 이후 일제는 더 이상 적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해 풍유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필로에 의해 시작된 풍유적 해석은 클레멘트(Clement, ca. 150 -215)를 거쳐 오리겐에 의해 발전하게 된다. 클레멘트는 ‘4장로’와 ‘24장로’를 기독교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에 대한 상징’으로 보았다(strom. vi. 13, §107). 또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의 꼬리’는 ‘부도덕한 교사들의 유해한 영향력’으로 보았다(strom. iii. 18, §106).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의 화려한 기초석들’은 ‘사도적 가르침의 다양한 은혜’로 보았다(paed. ii. 12, §109).

 

오리겐(Origen, †254)은 이전의 교부들이 요한계시록 20-21장에서 문자적으로 천년왕국을 해석한 것에 대해 ‘유대적이다’라고 거부했다(de princ. ii. 11. 12). 그 대신에 자의적으로 해석했는데, 예를 들면 ‘인이 쳐진 두루마리’를 그리스도께서만 열쇠를 갖고 계신 ‘성경’이라고 했다(phi loc. v. 5). ‘하늘에서 흰 말을 탄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오는 환상’을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지혜의 환한 빛을 통해 신적인 말씀에 의해 그에게 하늘이 열리는 것’으로 보았다(in Ioann. t. ii. 6).

 

또 메소디우스(Methodius)도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따랐는데, 그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여자의 아이’를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세례 받은 영혼들’이라 했다. ‘용의 일곱 머리’는 ‘커다란 죄악들’이고 ‘열 뿔’은 ‘십계명의 열 가지 계명들에 대적하는 것’이며, ‘짐승’이 나타나는 것은 육체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symp. viii. 4ff).

 

한편, 라틴어를 사용한 3세기 라틴 교부들은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에 의해 시작된 문자적 해석의 경향을 따랐다. 그러므로 터툴리안(Tert ullian, ca. 195)은 ‘바벨론’을 ‘로마’로 보았다(adv. Marc. iii. 13).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교회를 대항해 전쟁을 수행할 적그리스도’라고 했다(de resurr. carnis, 25). ‘성도의 나라’는 비록 그것이 다른 질서에 속한 것일지라도 ‘땅에 위치하고, 몸의 부활에 의해 먼저 있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adv. Marc. iii. 24).

 

그리고 빅토리누스(Victorinus †303)는 요한계시록 20장을 천년왕국으로 해석하고, ‘네로의 부활’(Nero Redivivus) 이론과 나팔들 및 대접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보다 병행하는 ‘반복 이론’을 제시했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요한계시록 해석에 대한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티코니우스(Tyconius, ca. 390)는 당시에 획기적인 주석을 저술했다. 그는 문자적 해석을 한 빅토리누스보다 풍유적 해석을 한 오리겐의 전철을 따랐다. 당시 안디옥 학파의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키릴 간에 있었던 논쟁은 네스토리우스가 에베소회의(431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되는 바람에 키릴의 승리로 끝났다. 따라서 티코니우스는 문자적 해석과 역사적 성취를 전혀 배제하지 않았을지라도, 신비적인 해석에 치우쳤다.

 

그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방법론을 ‘자유 법칙’(liber regularum)이라고 하는데, 이 원리에 근거해 요한계시록의 해석자들은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상징화된 보편적인 요소로 간과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을 ‘교회’로, ‘바벨론’을 ‘악한 세상’으로 보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소위 이상주의(idealism) 해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마 티코니우스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게 된 이유는 당시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과 기독교를 핍박하는 황제들을 적그리스도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요한계시록을 ‘선악의 싸움’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즉 보편론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티코니우스는 어거스틴(Augustine)을 비롯해 프리마시우스(Primasius), 카시오도리우스(Cassiodorius), 아프링기우스(Apringius), 베데(Bede, †735), 베아투스(Beatus) 등 많은 추종자들을 갖게 되었다. 중세 초기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공상 혹은 자기 시대의 필요나 사상에 따라 세부적인 것들이 달라지는 신비적 주석(mystical exegesis)을 하게 되었다.

 

한편, 동방의 안드레아스(Andreas)는 아마 요한계시록의 고대 해석자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그는 성경에 삼중 의미(문자적, 영적, 신비적 요소)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약에서 다른 책들보다 요한계 시록을 영적 해석이 적합한 것으로 보고, 특별히 해석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신비적 해석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비적 해석으로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성취에 관심을 기울였다. ‘바벨론’을 ‘세상’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교회의 대적’으로 여겼다. ‘일곱 왕들’을 ‘세상 권력의 계속된 나타남’으로 보았으며, 그것의 ‘여섯째’는 ‘로마’이고 ‘일곱째’는 ‘콘스탄티노플’로 보았다. 안드레아스는 이레니우스, 오리겐, 티코니우스를 섞은 혼합주의자였다. 그에 의해 오늘날 소위 역사주의(historicism)가 시작된 것이다. 그후의 사람들은 사도 요한의 예언을 역사의 과정에서 찾아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세 시대(5-15세기)

 

성경해석학에서 중세에 창조적 학문 활동이 미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4중의 의미를 찾았다. 즉 문자적 의미(historia), 풍유적 의미(allegoria), 도덕적 의미(tropologia), 신비적 의미(anagoge)이다. 중세를 이끌게 된 어거스틴(ca. 354-430)은 풍유적 의미의 기초로서 문자적 의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성경의 4중 의미를 지지하면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에서 티코니우스의 풍유적 해석을 따랐다. 그 결과로 중세 1,000년 세월 동안 풍유적 해석이 지배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요한계시록 20장의 해석에서 대부분 티코니우스의 해석을 따랐다(de civitate, xx. 7ff).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주석가들이 티코니우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9세기 작가 베렌가우트(Berengaud)는 신비적 해석을 역사적 해석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인간 역사의 모든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첫 여섯 인들’은 ‘아담에서 예루살렘 멸망까지의 세상 역사’를, ‘첫 여섯 나팔’은 ‘교부 시대에서 기독교 순교자들의 시대까지 말씀의 선포’를 나타낸다고 했다. ‘두 증인들’은 주님의 재림에 앞서 오게 될 ‘에녹과 엘리야’라고 했다. ‘첫째 짐승’은 ‘적그리스도’이고, 그의 ‘일곱 머리들’은 ‘일곱 가지 죽을 죄들’이며, ‘둘째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추종자’이거나 ‘그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이고, ‘바벨론’은 ‘이방 로마’라고 했다. 로마는 ‘마귀의 도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음녀가 앉았던 짐승의 열 뿔들’은 로마 제국을 파멸시킨 ‘야만족의 계속되는 침략’을 가리키는 것으로 ‘천년’은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세상 끝까지’를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더욱 획기적인 해석이 요아킴(Joachim, †1202)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요한계시록과 12세기 사건 사이의 일치점을 발견하려 했다. 당시 풍유적 해석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으므로, 그는 역사적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왕국적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첫 번째 천년왕국은 성부에 의해, 두 번째 천년왕국은 성자에 의해, 성령님에 의해 주도되는 세 번째 천년왕 국을 여전히 미래에 두었다.

 

그에 따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십자군에 의해 죽도록 상처를 입은 ‘이슬람’이고, ‘거짓 선지자’는 ‘당시의 이단들’이며, ‘바벨론’은 더 이상 이교도가 아니지만 세상적이고 악이 지배하는 ‘로마’라고 생각했다. ‘다섯째 짐승의 일곱 머리’는 ‘프레드릭 I세 황제’이고, ‘여섯째’는 ‘살라딘’이며 ‘일곱째’는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이 적그리스도의 파멸은 세 번째 천년왕국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갖게 된다고 했다.

 

요아킴은 로마 교회와 교권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 교회를 대적하는 쪽으로 급속하게 해석적 경향을 바꿨다.  특히 피터 존 올리바(Peter John Oliva, ca. 14세기 초)는 ‘짐승’을 ‘교황’으로, ‘짐승을 탄 음녀’를 ‘교황의 로마’와 동일시했다. 그리고 이런 반교황적 해석은 나중에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편, 교황청의 입장에서 반대급부적인 시도가 리라의 리콜라스(Nicolas of Lyra, †1340)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반복 이론을 버리고, 요한계시록이 사도 시대에서 역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해석법은 이후 수년 동안 풍미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 시대(16세기)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개혁적 진영에선 이미 요아킴에 의해 시작된 반로마 교황적 해석이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교황 혹은 교황청이 적그리스도’라는 공식은 해석의 기초였다. 루터(M. Luther)는 요한계시록 4장 이후를 로마 교황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교회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19세기까지 개혁주의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의 해석을 무조건 따라 갈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루터의 반교황적 해석은 지나치게 로마교를 의식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칼빈(J. Calvin)의 다른 주석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요한계시록의 주석을 쓰지 않았다. 혹자는 칼빈이 요한 계시록의 주석을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의 재세례파와 같은 이단들이 계시의 지속성을 주장하려는 근거로 요한계시록을 사용한 것을 들어 칼빈이 요한계시록의 주석을 쓰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칼빈이 죽기 전에 다니엘서를 주석한 것으로 보아, 그 다음 차례는 요한계시록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한편, 교황청에서 프로테스탄트를 공격하던 중에 새로운 방법들이 나타났는데, 이 방법은 공교롭게도 개혁자들 사이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스파니아드(Spaniards)와 예수회 회원들이었다. 사라만카의 교수인 프란시스 리베랴(Francis Ribeira, †1601)는 교부 시대의 헬라어와 라틴어 주석에 모두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에 대해 가까운 미래와 마지막 사건들에 국한되고, 중간 단계의 역사에 어떤 일치점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를 교회사 중에 적그리스도와 격리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대부분의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음녀 바벨론’과 ‘로마’를 동일시했을지라도, 사도 요한이 ‘짐승’이라고 본 것은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는 아니고 ‘미래의 타락한 로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리베랴를 미래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를 미래주의자라고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동료인 예수회 회원 알카자(Alcasar, †1613)는 철저하게 과거주의자였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교회와 유대교의 충돌을 나타내는 4-11장과 교회와 이교주의의 충돌을 그리는 12-19장으로 나눴다. 그리고 20-22장은 교회의 현재적 승리를 묘사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 황제 때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알카자와 리베랴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자신들이 살던 16세기의 교황들에게 적용 못하게 하려고 글을 썼다. 그리고 그들의 설명은 때로 많은 난점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작품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시대 상황에서 요한계시록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발전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광범위하게 다른 시대의 사건과 사상으로 읽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17-19세기)

 

16세기 종교개혁은 오랜 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에 지친 유럽의 교회들은 서로의 신앙을 인정하자는 소위 고백주의(confessionalism) 시대를 거치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전통을 탈피하고자 시작된 운동이 경건주의(pietism)였다. 한편 당시에 이신론(理神論)이 유행했는데, 인본주의적 영향이 신학을 지배하고 소위 합리주의(rationalism)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성의 권위를 계시 위에 두고, 성경을 철학에 맞춰 나갔다. 그 결과로 역사비평이 태동하게 되었다.

 

대륙에선 두 명의 탁월한 권위자인 캄페기우스 비트링가(Campegius Vitringa)와 벵겔(Bengel)에 의해 다양한 결과들을 갖고서 동일한 해석의 일반적 체계가 채택되었다. 비트링가는 개신교에서 처음으로 1,000년의 미래적 해석을 시도한 주석자다. 그리고 벵겔 역시 교회사적이고 천년왕국적인 해석을 결합시켰다.

 

흐로티우스(Hugo Grotius)와 하몬트(Hammond)는 일반적으로 알카자의 입장을 따랐다. 특히 흐로티우스는 아주 의식적으로 모든 신조주의를 배격하고, 요한계시록을 저자의 생애와 시대의 배경을 근거로 연구할 것을 주장했다. 18세기 대부분의 합리주의 주석가들은 흐로티우스의 연구를 토대로 삼았다. 18세기 말에 아이크혼(Eichhorn)은 최근에 다시 떠오르고 있는 특징에 대해 지적했다. 그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위대한 시(poem)였거나 기독교 믿음의 진전과 승리의 드라마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 역사적인 주석이 강세를 띠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요한계시록의 현대적 해석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뤼케(Fr iedrich L?cke)였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에스겔서나 다니엘서 이후의 묵시문헌으로 분류하고 합리적인 비평주의로 다뤘다. 그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환상을 시대사적으로 로마와 네로를 연관시켜 해석했다. 뤼케의 뒤를 이어 드 베테 등이 교회사적 해석을 이어나갔다.

 

한편 전승사적이고 문헌비평적인 해석이 나타났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기독교 회중의 독서를 위해 채택된 유대적 작품이거나 비정경적 묵시문학들로 편집된 것이라면, 1세기 종말론에 대한 지식의 보고(寶庫)이거나 모호한 시대에 대한 빛을 주는 역사적 기념물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다. 이런 경우에 요한계시록이 역사학도들에게 중요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예언으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진지하게 취급될 수 없다고 했다. 독일 전역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런 평가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현대(20세기 이후)

 

20세기 초에 미국을 중심으로 세대주의적, 전천년적 미래주의 해석이 유행했다. 당시 전천년주의 작가인 린드세이(Hal Lindsey)의 책 「마지막 혹성 지구」(The Late Great Planet Earth)는 19세기 미국에서 비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였다. 그의 저서들인 「마지막 그리고 미래의 세계」(Th e Last and Future World)와 「마지막 세대」(The Terminal Generation)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그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함께 해석했는데, 다니엘서의 넷째 짐승을 ‘로마’로 해석하고 그것을 20세기 ‘유럽 10개국 연합’으로 보았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을 ‘적그리스도’로 보고, 그 짐승을 ‘미래 총통’(The Future Fuehrer)이라고 했다. 이 인물은 유럽 10개국 연합을 인수할 ‘미래 로마 독재자’(future Roman dictator)이고, 그는 치명적인 부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한국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적 미래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국내에 개신교가 들어온 배경엔 19세기 말의 그들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대부흥운동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적 영향으로 초창기 한국 기독교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는 미래주의적 경향을 많이 띠었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암울한 현실과 잘 맞아 떨어졌다.

 

한편으로 박형룡, 박윤선, 헨드릭슨의 주석을 비롯해 한국에 소개되는 복음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주로 전천년설 혹은 무천년설을 신봉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은 주로 세대주의나 이상주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20세기 중반에 들어 역사비평 방법이 여전히 시도되는 중에 다양한 문학비평 방법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피오렌자(E. Sch?ssler Fiorenza), 콜린스(Adela Yarbro Collins), 포드(M. Ford), 피핀(Tina Pippin) 등으로 대변되는 여성 신학자들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 피오렌자는 “요한계시록이 역사적, 수사적 상황에 맞는 다른 상징적 세계의 시적이고 수사학적인 작품이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요한계시록은 상상력이 풍부한 경험을 만들 뿐 아니라,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계시록의 연구는 저자나 내용 자체를 떠나 독자들의 반응에 주목하게 되었다.

 

 

결론

 

오늘날 요한계시록의 해석을 위한 너무나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역사주의나 미래주의 혹은 이상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입장을 선호하는 이유는 루터가 요한계시록을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루터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당대의 로마교를 지나치게 의식해 적그리스도를 교황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첫 독자들과 해석자인 교부들은 대체적으로 ‘과거주의’ 입장을 지녔다. 적그리스도를 교황으로 보기보다 유대주의나 로마로 보았다. 그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역사주의, 미래주의, 이상주의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은 후대에 발전된 것이다. 당시의 의미(What it meant, then?)를 찾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의미(What it means, now?)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려고 한다면, 과거주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편 과거주의는 부활도 재림도 지나간 것이라는 이단적 사상인 완전한 과거주의(full preterism)와 역사 끝에 재림을 남겨 둔 것이라는 부분적 과거주의(partial preterism)로 나뉜다. 게리 드 마르(Gary De Mar), 칠톤(David Chilton), 러쉬두니(Rushdoony) 등을 중심으로 신율주의(Christian Reconstruction Movement, 기독교재건주의)와 구속사적 성경 해석을 주장하는 조르단(James B. Jordan)에 의해 주도되는 성경연구원(Biblical Horizons)에서 후천년의 부분적 과거주의를 보급하고 있다. 앞으로 부분적 과거주의에 주목해야 한다.

 

 

 :: 필자 정보 - 이동수/천안대학교기독교학부교수

   이동수_고신대학교(B.A.)를 나와 고려신학대학원(M.Div., Th.M., Th.D.수료)과 미국 미네소타신학교(Mi nnesot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Ph.D.)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