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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글은 "오늘의 '바빌론'과 요한계시록"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정치적 해석의 측면을 잘 설명해 주는 글이기에 본 블로그에는 위와 같은 제목을 정했다.
https://m.blog.naver.com/teentopia/220044572847
- 2007년 12월호 요한계시록 연구 4
안 용 성 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초빙 교수
지난 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로마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계시록은 바빌론이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로마를 기술하고 있으며, 사탄의 비호하에 있는 이 제국 권력이 멀지 않아 한 순간에 몰락할 것임을 경고하며 성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많은 독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던 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이미 지도상에서 없어져 버린 한 제국의 멸망을 예고한 책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점에서 오늘에까지 이르는 요한계시록의 해석사는 로마의 멸망이 각 시대의 독자들에게, 즉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는 그 의미에 대한 요청이 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그 시대적 상황과 연결짓게 하는지 특히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측면에 집중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호처럼 이번 호도 먼저 해석사로 시작하려고 한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내기 위해 역사적으로 어떤 해석적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는지 개괄해 본 후,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큰 영향력 을 가지고 있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종말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그 해석학적 문제들을 논의해 보기로 하자.
바빌론과 로마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후 1세기 지중해 연안에 살던 초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난 2천년간 이 땅의 곳곳에 살다 간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은 구원의 길과 삶의 지침을 제공해 왔다. 이처럼 성경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이유는 각 책의 기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셨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 본문이 각 시대에 맞게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해석이란, 간단히 정의하자면, 본문과 독자 사이의 시공간 간격을 메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본문 가운데는 어느 시대 누가 읽어도 자명한 말씀들이 있는가 하면, 기록 당시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잘 이해하기 힘든 말씀도 있으며, 원칙은 동일하지만 시대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도 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주후 1세기 말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각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게 된다. 계시록의 해석에서 시대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였던 주제 중 하나는 멸망할 ‘바빌론’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지난 호에 살펴보았듯이 계시록에 등장하는 바빌론은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암호명이다. 계시록이 기록된 후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기까지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빌론이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는 제국 로마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로마는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자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자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소수 종교였다. 요한계시록이 그 로마의 멸망을 예고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초기 그리스 도인들에게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계시록은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었다.
이러한 계시록 해석에 중대한 전환이 불가피했던 것은 다름 아닌 제국 로마의 회심이었다. 로마가 이제 더 이상 박해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을 때, 예수의 강림이 곧 로마의 멸망이 될 것이라는 이전의 해석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바빌론’이란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이교도 로마이며, 로마의 개종은 곧 바빌론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바빌론이 멸망했다면 (18:1~19:10) 다음은 백마를 탄 기수, 곧 그리스도가 오실 차례다(19:11~16).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러한 해석은 또 다시 수정되어야 했다.
문자적 해석의 난관은 한편 영적 해석의 우세로 나타났다. 알레고리적 삼중 해석으로 유명한 오리겐은 계시록의 상징들을 영적 실재로 이해했다. 그에게서 바빌론은 현실 제국이 아니라 영적 실재이며 천년왕국을 포함한 종말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졌다. 어거스틴의 해석도 이러한 전통의 연속선상에 있다.
다른 한편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현세적 천년왕국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개종한 로마 제국과 연결시키려 했다. 악의 상징이던 로마가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의 도구로 재해석되기에 이른 것이다.
어거스틴은 예수의 초림과 교회의 탄생을 통해 사탄이 결박되었다고 해석함으로써 (계 20:1~3) 중세교회를 천년왕국과 동일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교회가 부패하여 개혁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은 적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계시록 해석은 다시 한번 방향 전환을 겪었는데, 천년왕국의 수장으로 이해되던 교황이 이제는 바빌론의 괴수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짐승’과 ‘바빌론’으로 대표되는 계시록의 악의 상징에 대한 해석이 역사상의 로마 제국에서 이교도 로마로 그리고 교황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변함이 없었던 한 가지 사실은, 그 해석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다 로마 제국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 제국 그 자체이든 하나님을 믿지 않던 시대의 로마이든 아니면 로마가 사라진 후 그 제국의 판도에서 황제와 권력을 다투던 교황이든 말이다.
이러한 해석의 변화는 바빌론이 곧 로마라는 본문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본문이 해석자의 현재에도 의미를 갖게 하려는 해석적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계시록의 해석이 성경 다른 책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그 해석의 진폭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동일한 대상이 어떤 시대에는 악의 상징으로 이해되다가 다른 시대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간주되기도 하는 극단적인 변이는 일반적인 성경 해석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는 시각은 종교개혁과 동시대에 일어난 혁명 운동들의 해석에도 나타난다. 과격파 종교개혁을 이끈 토마스 뮌쩌(Thomas Muentzer)와 동시대에 살았고 혁명적 천년왕국 운동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이 그 대표적 인물인데, 루터와 「제네바 성서」가 교리적 이유로 인해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했다면, 혁명가들 은 정치적 억압자로서의 교황을 그렇게 이해하였다.
짐승의 통치를 그 시대의 억압적 정치권력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영국 시민전쟁 기간에 제라드 윈스탠리(Gerrad Winstanley)는 전문 성직, 왕권, 사법권,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를 다니엘서의 네 짐승과 동일시했으며, 왕권은 사라져야 할 ‘옛 하늘과 옛 땅’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비슷한 해석이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도 나타나, 코울리지(Samuel Taylor Coleri dge)는 혁명을 통해 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적 격변기에 나타난 계시록 해석에 로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도 사라지고 로마의 판도를 호령하던 천주교회의 영향력도 예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서 짐승과 바빌론은 더 이상 로마와 어떤 관련을 가지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상정한 억압적 정치권력으로서의 짐승 해석은 이제 로마와의 역사적 연속성보다는 박해자로서의 바빌론의 이미지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계시록의 ‘의미’를 정치적 상황에서 찾아내려는 해석 관점은 천년왕국 운동과 근대의 해석자들을 지나 오늘날까지 이어져 파블로 리차드 (Pablo Richard)나 알란 보싹 (Allan Boesak)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계시록 주석서는 이전의 해석들보다 더 학문적으로 뒷받침되어 있으며, 저자들이 처한 제3 세계의 정치적 맥락에서 계시록의 상징들을 해석해내고 있다. 보싹의 책 「위로와 저항(Comfort and Protest) 」은 요한계시록이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아파테이트)에 대항한 투쟁 과정에서 저항을 위한 독려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난 받는 흑인들을 위한 위로의 말씀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계시록과 문명, 종교, 이데올로기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세대주의 전천년설도 정치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존 다비(John Nelson Darby)의 「스코필드 주석 성경」을 거쳐 체계화되고 린세이 (Hal L indsey)의 「 대 유성 지구의 종말 (The Late Great Planet Earth) 」같은 책들을 통해 오늘날의 시대적 정황에 맞추어진 계시록 해석에서 종말의 적그리스도 세력은 다시 일어날 로마 제국, 즉 유럽공동체(EU)를 중심으로 종교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결탁된 새로운 국제적 동맹이다. 단, 그 세력들 간의 구체적인 관계의 양상에 대해서는 이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되어 있지 않다.
곧 나타날 사탄의 세력을 유럽과 중동 국가들, 러시아와 중국 등으로 예견하는 이들의 종말 시나리오는 계시록과 에스겔서, 다니엘서 등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다. 이스라엘의 재건국과 그로 인한 중동의 불안은 종말의 결정적 징조로 해석되며, 옛 로마의 판도 위에 다시 세워질 유럽공동체는 다시 일어날 로마로 간주된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아마겟돈에서 하나님에 대항하는 사탄의 세력(16:12~16)은 ‘이만만’의 군대를 동원하며 (9:16), 러시아로 간주되는 ‘곡과 마곡’(겔 38, 39장)이 그 세력의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지구상에서 ‘이만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수인 2억의 군대를 동원할만한 나라는 중국 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은 ‘이만만’을 중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나리오는 성경 각 본문의 구절들을 자신들 나름의 국제정세 분석과 조합하여 짜맞추었기 때문에 그 구성이나 배열에서 정확한 성경적 근거를 찾기 힘들다. 성경 해석이라기 보다는 성경의 구절들을 활용해 새로이 만들어 낸 독자적 예언이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 각 책들의 맥락을 무시한 채 하나로 조합하다보니 중요한 세부사항들에서 계시록의 내용과 충돌한다.
계시록의 여섯 번째 나팔 재앙에 등장하는 ‘이만만’의 마병대는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항하는 군대가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자들 이다(9:13~21). 또 아마겟돈 전쟁은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나는 반면 ‘곡과 마곡’의 동원(20:7~10)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에, ‘곡과 마곡’을 아마겟돈 전쟁 시나리오에 포함시키는 것은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전천년설과 조화될 수 없다.
종교개혁 이전의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짐승’과 ‘바빌론’은 로마 제국과의 역사적 연속성에 근거하여 상정되었다. 천년왕국 운동과 이후의 정치적 해석에서 ‘짐승’은 억압적 정치권력이라는 점에서 로마와 연속성을 가졌다. 반면에 세대주의가 상정하는 짐승과 바빌론의 세력은 지리적으로 볼 때는 로마의 범위를 뛰어 넘는 국제적 세력이며 그러한 해석의 주창자들이 그 국가들로부터 직접 정치적 억압을 당했던 것도 아니다.
세대주의가 사탄의 세력을 판가름하는 선악의 기준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종교적이다. 러시아를 곡과 마곡으로 간주하는 것은 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병행하고, 중동 국가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이슬람교 국가들은 그렇다 치고, 기독교 세계인 유럽공동체를 짐승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계시록이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의 판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전 세계를 지배할 짐승의 세력이라면 당연히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포함한 전 지구적인 제국 세력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짐승의 후예를 유럽으로만 한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해석에 동의할까?
세대주의 종말론이 상정하는 사탄의 세력은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넘어, 어떤 점에서는 사무엘 헌팅톤이 그려내는 새로운 문명 세력의 판도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는 「문명의 충돌(The Cl ash of Civilization)」이라는 책에서, 냉전 시대에는 이데올로기가 세력의 경계선이었던 반면, 냉전이 끝난 앞으로의 시대에는 문명의 다양한 경계가 곧 새로운 전선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이것은 중동 국가들이 하나님에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며 새로이 일어나는 아시아의 세력, 곧 중국이 전쟁의 중추가 될 것이라는 세대주의의 시나리오는 이러한 예측과 통하는 것이다.
미국 정가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헌팅톤의 이 책은 원래 그가 「외교 문제 (Foreign Affairs)」라는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확장한 것이다. 헌팅톤의 글은 재편되어가는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의 현실적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새로운 판도를 예상하고 그 판도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할 전략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앞으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이슬람 문명과 유교 문명이 미국의 적이 될 것이라는 헌팅톤의 예측은 중동과 중국이 곧 사탄의 세력이라는 종말 시나리오에 의해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세대주의의 계시록 해석은 미국의 정치전략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토대로 이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전임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어느 기독교계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마겟돈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는 에스겔 38~39장에 나오는 곡이 곧 러시아라고 믿었는데, 그가 사용한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는 정치적 수사의 배경에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이 정치 문제에 선과 악의 수사학을 사용하는 예는 레이건 외에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수사학을 통해 그들은 종교, 특히 기독교를 정치와 결탁시킨다.
정치가들의 선악의 수사학이 위험한 이유는 적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스스로를 절대 선과 동일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경찰국가로 자처하며 국제질서를 어기는 나라들을 ‘징벌’하는 역할을 자임해 왔는데, 여기에 종말론적 상상력이 더해지면, 미국에 반대하는 나라는 사탄의 세력이 되고 미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세대주의에 입각해서 종말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앞서 언급한 사탄 세력 국제적 동맹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위에 제시한 몇 가지 사례들은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문명관 그리고 미국 우월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해석 경향에도 역시 넓게 이해하자면,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해석적 요청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이 계시록을 ‘오늘’ 의미 있는 책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 시대가 곧 계시록이 예견한 종말의 때라 단정하고 오늘날 일어나는 사건들을 종말 사건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파급 효과는 매우 강력하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해석이 때로 뜻하지 않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폭력과 선악의 이분법
이 시대를 종말의 때로 단정하는 시각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계시록에 담겨 있는 극단적 이분법이 현실에 잘못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묵시문학 특유의 구원과 심판의 이분법이 나타나는데,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나면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운명이 예리하게 나뉘어서 구원받을 사람들은 인을 쳐 보호받는 반면 (계 7:1-8; 9:4; 14:1), 땅에 거하는 자들 (계 3:10; 6:10; 8:13 등)은 하나님의 혹독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다. '심판'(명사형으로 14:7; 16:7 등, 동사형으로 6:10; 11:18 등), '진노'(6:17; 11:18 등), '재앙’(9:18, 20 등), ‘화’(8:13; 9:12 등) 등의 어휘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징벌은 오직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향하며,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동안 바로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듯이, 심판받는 자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극도의 잔인한 표상들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구원이나 완전한 심판을 단정할 정도로 백 퍼센트 선한 집단이나 백 퍼센트 악한 집단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종말론적 상징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어떤 집단을 현실 세계 속의 어떤 국가 조직과 또는 그 ‘적’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요한계시록에는 폭력적인 표상들이 가득하다. 우주적 격변, 전쟁, 추수 장면, 심판 장면으로 이어지며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묘사되는 과정에는 땅, 바다, 강, 하늘 등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에 대한 혹독하고 끔찍한 응징이 계속된다.
황충은 전갈과 같은 권세로 차라리 죽기를 구할 정도로 가혹하게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게 하며(9:1~11)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서는 피가 튀어 천육백 스타디온에 퍼진다(14:20). 짐승과 그를 따르던 자들은 칼에 죽고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운다(9:20~21). 뿐만 아니라 음녀 바빌론에 대한 응징에서 폭력의 표상은 물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17: 16).
게다가 요한계시록에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미지와 아이디어들이 가득하다. 오직 계시록에만 말을 타고 칼로 무장한 예수님이 등장한다.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종말의 시나리오 속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순교자들은 피의 신원(복수)을 갈구하며, 하나님은 그들의 탄원에 응답하여 적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하신다. 하나님의 진노의 혹독함이 이러할진대, 현실 세계의 ‘적들’이 계시록의 사탄의 세력과 동일시되고 그것이 전쟁 이데올로기가 되어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응징’을 정당화하게 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집단도 하나님의 군대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자처할 수 없다. 종말적 심판과 재앙, 징벌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따라서 폭력을 종말론적으로 정당화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참칭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지 감히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해석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심각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여느 다른 책들과 달리 인간의 행동에 거룩한 동기를 부여한다. 그 거룩한 동기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때로는 그 동기가 잘못 부여되어 생명을 죽이거나 제한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 초기 정착자들의 원주민 학살이나 노예 제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 확장 같은 억압적 살상 행위들이 성경 해석을 통해 정당화되었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계시록처럼 강한 이분법에 토대되어 있고 심각한 폭력적 이미지들로 가득한 책에 대한 해석에는 해석자의 더 큰 주의와 책임이 요구된다. 성경 해석의 윤리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적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까지 다룬 주제들에 관해 요한계시록에 담겨 있는 전혀 상반된 이미지들의 병존 또는 모순으로 보이는 서술들에 주목하게 한다. 가장 선명하게 대조되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모습이다.
계시록 5장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열기에 합당한 자가 누구냐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 책을 펼 자가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요한이 크게 울 때, 장로 중 한 사람이 그 인을 떼실 분은 바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임을 알린다.
이제 승리의 포효와 함께 갈기를 휘날리며 동물의 왕 사자와 같은 이미지로 그 분이 등장하리라 기대되는 순간에 요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니라 '죽임 당한 어린양'이다
(6절). 죽이는 사자가 기대되는 순간에 죽임 당한 어린양이 등장하는 이 극단적인 대조는 계시록에 서술되는 심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성도들이 사탄을 이김은 폭력이나 정복을 통한 것이 아니라 죽임 당함을 통해서다. 다섯 째 인을 뗄 때 하나님의 신원을 갈구하는 순교자들에게 들려온 소리는 그들의 형제들이 죽임을 당하여 수가 차기까지 잠시 쉬라는 것인데, 이 죽임 당함은 동시에 승리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12장 11절의 찬송 한 소절은 이러한 싸움과 승리를 적절히 예증해 준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사탄)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시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적을 물리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이다. 그 피 흘림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계시록의 궁극적인 귀착점은 바로 폭력 없는 나라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감을 기술하는 새 예루살렘의 묘사에 주목해 보자(24절). ‘땅의 왕들’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이미 모두 멸망해 버렸는데(19:19~21) 여기 또 등장하는 왕들은 누구인가? 많은 계시록 해석자들에 의해 서술상의 모순 또는 긴장 관계로 인식되어 온 이 두 묘사는 요한이 그려주는 심판의 본질이 무엇인지 암시해 주는 단서다.
계시록이 묘사하는 상징적인 폭력과 파멸의 이미지들은 묵시문학적 서사 세계 속에서 이해되어야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계시록이 묘사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은 선과 악이 뚜렷이 구분되는 영적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어떻게 그 시대 상황과 맞물려 새로운 바빌론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왔는지 찾아보았다. 특히 오늘날 여전히 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종말 시나리오가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해석자들의 문화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위험성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인의 종말 신앙은 우리 삶의 매일이 마지막 날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가르쳐 주시고 다른 신약 성경의 기자들이 강조하듯, 그 마지막 날은 결코 객관적으로 계산되거나 입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단정은 유익과 함께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실제로 남용 또는 오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에는 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더 심각하게, 해석의 윤리가 요청된다. 해석자의 윤리적 책임 의식은 계시록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책일 뿐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책이 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지고 실천되어야 할 덕목이다.
※ 지난 11월호 실린 필자의 글 중, 100쪽 첫 문단에서 어거스틴의 ‘후’천년설을 ‘무’천년설로 바 로 잡습니다.
:: 필자 정보 - 안용성
안용성 장로회신학대학교(Th.B., M.Div., Th.M.)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교(S.T.M.)와 GTU(Graduat e Theological Union, Ph.D.)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초빙 교수로 신약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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