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06 본인의 선한소망교회 카페에 게시한 글입니다. https://cafe.daum.net/craca/ODIx/37
요한계시록 1:1-3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요한계시록 1:1-3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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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로이 요한 계시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지는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일부 사람들의 관심사였고, 이러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용한 일부 목회자 혹은 거짓 선지자들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 거짓 선지자들,이 살던 주변의 사람들과 공동체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의 기성 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아예 목회와 설교 현장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을 말하는 순간 그는 거짓 선지자 중 하나가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1절부터 3절을 읽어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1절은 계시, 2절은 요한의 증거, 3절은 이 말씀을 통한 복, 이렇게 "계시 - 증거 - 복"으로 압축됩니다. 특히 3절에 집중하여 묵상하면, 복 있는 자들은 읽는 자, 듣는 자,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자, 이렇게 세 유형의 사람들이 나열됩니다. 이 세 가지를 다 하든지, 아니면 그중 하나나 둘만 해도 됩니다. 이 묵상을 1, 2절과 연결하여 계속하면 예수님의 계시가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사도 요한의 증거를 듣고 읽고 지키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Kierkegaard의 왕의 명령의 우화를 떠올리지 않아도 요한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해석만 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돌아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의 전제 조건인 읽고 듣고 지키는 일은 분리되지 않고 한 덩어리임을 또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요한이 증거하는 계시의 내용을 읽고 들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의 내용대로 지키지 않은 자는 복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래에 선한소망교회 카페에 게시한 글을 옮깁니다. 복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3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할렐루야! 예수 믿고 “복”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말로 복음, 즉 “복이 있는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창세기 1:21-22 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다와 하늘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날개 있는 새들을 창조하신 후 하신 일은 바로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8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후 그들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또한 시편 1:1-2 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본문인 계시록 1:3 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그러니까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성경의 한 가운데에 해당하는 시편의 첫 장에서 다시 언급된 후,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서두에서 또 다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성경의 가운데를 말하자면 성경의 한 가운데 절은 시편 118:18 이고 한 가운데 장은 시편 117편입니다.)
이쯤 되면 성경은 “복”으로(창세기) 시작하여 한 가운데에(시편) “복”이 있고 마지막도(요한계시록) “복”으로 종결짓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는 바로 “복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과 종말에 관한 책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요한계시록이 이처럼 “복을 받으라”는 책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일부 사람들이 얼마나 요한계시록을 오해했었는지를 잘 말해 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우주의 종말이 언제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책이 절대로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책을 읽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비밀스러운 내용들을 흡사 암호를 해독하듯이 신비스럽게 풀어내야 하는 수수께끼의 책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책을 읽은 결과,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주변의 친지들과 심지어는 가족들과도 기꺼이 결별하고, 지정된 장소에 모여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하는 책도 절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느 한 사람의 인간을 다시 오실 그리스도, 즉 재림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도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절대로 그렇게 오용되어서는 안 될 너무나 소중한 책입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더욱 현실을 실존적이고 복음적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그런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더욱 복음적이 되고, 더욱 적극적으로 전도와 선교를 하게 되며, 신자들은 물론이요 믿지 않는 자들도 더욱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읽거나 설교하기를 기피하거나 어려워 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예배 시에 그리고 모일 때마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욱 자주 자주 읽고, 듣고, 거기에 기록된 것을 지켜야 할 그런 책입니다.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복을 받게 만드는, 그런 아주 좋은 책입니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복”의 내용 내지는 개념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생물들에게 주신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땅에 가득차고 충만하게 되는 것이 짐승들과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에게는 여기에 덧붙여서 한 가지를 더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 복의 내용은 그 후 창세기 9:1 절에서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창세기 12:2 절에서는 아브라함(당시는 아직 아브람)에게로 다시 이어집니다. 제가 “다시” 이어진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복이 저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7 절에 보면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그 저주의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는 저주 받은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을 받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악인의 “경영(꾀)”를 따르지 말고, 죄인이 행하는 길 위에 서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구절은 마태복음 24:14 절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4-5 절에 와서는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고 적혀 있습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우리가 ‘서지 말아야 할 죄인들의 길’에서 그 ‘죄인들’의 이름 중에 “비밀”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을 “비밀”이라고 하는 자들은 바로 복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덧붙여 말하면 그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시편은 “복”을 받을 자가 해야 할 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요한계시록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좀 더 구체화해서 말해 줍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예언의 말씀”으로 특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과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그리고 그 내용대로 온 몸으로 행하여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연구에 있어서 가장 최근의 주목받는 학자로 G K Beale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주석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요한은 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그것이 전개되면 알겠지만, 마지막 때에 대한 지적 추측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현재의 삶에게 해주고자 하는 일련의 명령을 제공하려고 고안되어 있다.”
- G. K. Beale, David Campbell, Revelation: A Shorter Commentary, p.37.,
Wm. B. Eerdmans Publishing, 2015. 1. 2.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우리의 두 번째 자세를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주 읽으면서 그 내용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용에 대해 통달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잘 지켜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가운데서 그 내용을 정말로 잘 알아야만 하는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르는 문학 작품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지 않습니까?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이해하고 깨닫는 정도가 더욱 깊어지며, 그래서 읽는 재미와 맛이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삼국지’는 적어도 10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갔더니 박경리 작가의 ‘토지’라는 소설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토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역시 그런 문학작품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도 아닙니다. 많은 이익을 얻고 부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도 아닙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은 무슨 책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언의 책입니다. 무엇을 예언한 책입니까? 요한계시록 1:1 절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에수 그리스도의 계시,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알려주신 분은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창세기에서 모든 생물과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그리고 시편의 다윗에게도 “복”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1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그분의 “종들에게” 이 내용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시어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우리의 세 번째 자세를 정립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모든 계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관없이 얼마든지 미리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들은 가히 “복”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인간이 살아 온 과정 혹은 역사는 그저 우연한 일들과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계획하셔서 친히 진행해 가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첫 마디부터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갈 수가 없을뿐 아니라 설사 읽는다 해도 아무런 이해나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복을 받을 것이나 만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이 역사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 역사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마지막 세 번째는 인간의 역사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지금 현재의 삶을 더욱 긴장감 속에서 살게 합니다. 세상 끝날이 속히 올 것이라고 하셨지만 아직도 그날은 오지 않았다고 해서 성경의 말씀이 틀렸다고 불신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는 미처 이루지 못한 일들을 위해서 노력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론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긴장감 넘치는 삶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언제일지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분명 세상의 끝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강조점은 현재의 삶에 있습니다. 끝을 알고 긴장감 있게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메세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우리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적어도 10번 아니 20번 이상 읽고 그 내용에 대해 통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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