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ἵππος λευκός, καὶ ὁ καθήμενος, '흰 말과 그 위에 앉은 자'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 논점을 가진다.
1. 흰 말을 탄 자에 대한 두 가지 해석 - 긍정적 해석과 부정적 해석
빅토리누스는 흰 말을 가리켜 "세상에 보내진 성령으로 설교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그가 이렇게 해석한 근거로는 마 24:14의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든다.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일을 첫 번째 봉인을 해제하고 하신 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요 16:7–8의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이런 설명에 비추어 볼 때 흰 말을 탄 기수는 "설교자" 혹은 "복음 전도자"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처럼 빅토리누스는 계 6:1-2의 흰 말을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 뿐 아니라 계시록에서 사용된 흰 색의 이미지로부터 이러한 연관성을 찾으려 한 것 같다. 쾨스터 교수는 그의 앵커 바이블 주석에서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하나님의 보좌(20:11), 그리스도의 모습(1:14; 참조, 14:14; 19:11, 14)을 특징짓는다"고 했다.*
빅토리누스의 이러한 통찰로부터 후대의 일부 주석가들은** 흰 말을 탄 자를 "그리스도"라고 특정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다른 세 마리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기수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복음의 진전 내지는 승리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In Revelation white characterizes God’s throne (20:11), Christ’s appearance (1:14; cf. 14:14; 19:11, 14). p. 393.
** 오스본은 이런 주석가들로 Alford, Hendriksen, Hodges, Bachmann을 예로 든다. - Osborne, G.R. (2002). Revelation (pp. 274–277)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주석가들 대부분 흰 말과 그 탄 자를 전쟁 내지는 패권을 차지하려는 악한 세력으로 본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광복 목사는 그의 계시록 강해 (난제 해설) 에서 무려 23 페이지나 (pp. 269-291) 할애하여 국내외 학자들의 설명을 검토한 후 이 기수를 "적그리스도"라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로제(Lohse)는 그의 요한계시록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에서 이 둘을 모두 반박한다. 흰 말의 기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는 나머지 세 기수들과의 동질성이라는 측면에서, 즉 나머지 세 명의 기수들이 모두 다 불행을 가져 오는 자로 해석되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고, 또한 적그리스도라는 견해 역시 적그리스도는 종말 사건의 처음에 등장하지 않고 절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로제는 이어서 나머지 세 명의 기수들과의 관련성과 사도 요한이 기록한 당시의 독자들이 받아들였을 묵시문학적 암시와 시대적 배경 등을 종합하여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활을 들고 흰 말을 탄 기마자는 로마의 멸망을 희망했던 당대의 독자들에게 활로 무장된 파르테르 군대의 마병들로 이해되고, 파르테르 제국의 임박한 승리는 마지막 때의 첫 번째 징조로 이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처음의 네 인의 해제와 동시에 나타나는 네 말들은 전쟁, 일반적인 싸움, 기근, 역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 로제 저, 박두환/이영선 역 (1997), 요한계시록, 한국신학연구소, p.94-96.
2. 네 말의 색상이 갖는 의미와 상징에 대해
이러한 이해와 해석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네 말들의 색상에 관한 관심이다. 흰 색, 붉은 색, 검은 색, 그리고 청황색이 주는 일반적인 인상과 이미지들이 특정 시대적 배경과 관계없이 독자들에게 주는 상상력들이 있다. 거기에 더해 같은 계시록 본문에서 흰 말을 타고 재림하는 주님의 모습(19:11)은 첫째 인의 해제 시 나타나는 백마 탄 자의 이미지와 동일시 할 소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요한이 환상 중에 기록하고 있는 말들의 색상들은 고정된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고 쾨스터 교수는 말한다. 흰 색의 경우, 하나님의 보좌와 그리스도의 용모와 관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흰 돌에서는 신원(탄원)의 의미를 갖는다(12:17). 흰 옷은 순결과 명예(3:4, 5, 18; 4:4; 6:11; 7:9, 13)를 의미한다. 따라서 흰 말에서의 흰 색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와의 연관성보다는 정복과 승리와 더 잘 연결된다고 한다.
흰 말이 갖는 승리자의 이미지는 많은 군사적 지도자들이 사용했다. 로마의 율리우스는 페르시아를 이긴 후 흰 말을 탔다. 로마에 승리한 아시아의 군대들도 흰 말을 탔을 것이라고 작가인 프레곤(Phlegon)은 상상했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정복했을 때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에서도 나폴레옹은 사실은 당나귀였지만 승리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흰 말을 타고 있다. 이 승리의 이미지와 그리스도를 연결하기 위해 복음의 승리라는 이미지가 고안되었고 이에 맞추어 화살을 쏘는 것은 복음이 불신자의 가슴에 날아가 꽂히는 것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구약의 인유로 이를 설명하는 시도도 있다.
Aune는 WBC에서 이러한 네 말과 그 기수의 주제를 구약 스가랴서에서 빌려온 것으로도 말한다. 그리고 전쟁, 기근, 죽음, 전염병의 이미지를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렇게 설명한 오스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가랴에서 색은 네 바람을 상징하는 반면, 여기에서는 심판과 관련된 죽음과 파괴를 상징한다. Poirier (1999 : 260–61)는 이미지가 예레미야 15:2과 에스겔 5:12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다고 한다. 이 구절들은 모두 포로, 검, 기근, 죽음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ἵππος λευκός, καὶ ὁ καθήμενος, '흰 말과 그 위에 앉은 자'의 문자적 해석의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신약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환상과 관련된 몇 가지 실례를 알고 있다. 이 예들의 특징은 그 환상의 해석을 위해 구약이나 당시의 인문 자료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먼저 사도행전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하늘을 보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하나님과 우편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 하늘의 형상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설명했다.
"스데반은 지상에서 곧장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인자(그리스도)를 보았으므로 그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여러 하늘들이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찢어진 듯이 열려 있어야 한다."
여기서 여러 하늘이란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계의 하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사도행전의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또한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에서 빛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과 대화하는 장면 역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 이어서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신 주님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보인 환상 역시 동일하게 생각한다. 이 모두는 그들이 환상 중에 실제로 두 눈으로 본 영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주님은 그들에게 환상 중에 보이신 모습과 광경 그대로 나타나셨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 어떤가? 요한계시록 1:9에 나타나신 주님은 구약의 인유로 인한 상징이나 비유로 여기는가? 그가 들은 주님의 음성과 그가 본 모습은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이 부분에서 이 환상이 사실이고 실재했었던 일임을 고백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네 마리의 다른 색상이 말들은 어떤가? 이것 역시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영상이다. 왜 어떤 것은 실재했던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것은 비유와 상징으로 여기는가? 그 이유는 우리 인간들의 지식이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문자적 해석의 가능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1세기 당시의 사도 요한의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그들 역시 사도행전의 스데반과 사울과 아나니아와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등장하는 환상들 역시 문자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시의 독자들과 지금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의 틀이 될 것이다. 참으로 첫째 인이 해제될 때 흰 말과 그 탄 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온 지면을 다니면서 이기려고 할 것이다. 다만 지구 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메카니즘을 아직 모를 뿐이다.
이렇게 계시록에 대한 이해의 틀을 지닌다면 6장에 나오는 처음 네 인의 해제와 관련된 본문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통찰력은 네 색상의 말들과 기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심판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과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된다. 그리고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 성도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따르며 믿음을 지키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록에 기록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내용들에 대해서 그 지시물과 대상을 찾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그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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