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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연구/요한복음

요 3:1-2 니고데모와 예수님 - agape144000 v4 활용 예시

by 구봉환 2026. 2. 10.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나선 이: 니고데모의 만남과 우리의 위로

본문: 요한복음 3 1-2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찾아와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도 못할 것임이니이다"


서론: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목마름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때 또는 지금도 이런 질문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인생의 의미와 확신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인류의 오랜 숙제이며, 모든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실존적 갈증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지닌 한 인물을 우리 앞에 세웁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 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이력서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의 이 밤의 방문을 통해, 스스로 만족스러운 신앙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진정한 구원과 위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은혜를 경험하고자 합니다. 니고데모는 우리 자신의 거울입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자격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게 되며, 동시에 그 어둠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과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 위로가 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본론

 

대지 일. 니고데모: 가장 가진 것이 많았으나 가장 필요한 것이 없었던 인간 (자기 의의 한계)

 

본문은 니고데모를 두 가지 중요한 정체성으로 소개합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것입니다.

 

첫째그는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율법의 가장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스스로를 구별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경건의 표준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완벽하게 지키려 했던 이들입니다. 제네바 주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은 배운 자보다 못 배운 자가 더 무식할 수 있으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모두 그리스도에게로부터만 지혜를 구해야 한다."(Geneva-c.commentaries.cmt) 니고데모는 그 수많은 율법과 전통의 전문가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지식과 행위로 쌓아 올린 견고한 탑처럼 보였습니다.

 

둘째그는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최고 의결 기구였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이라는 뜻입니다. (Gill-c.commentaries.cmt, JFB-c.commentaries.cmt) 그는 사회적 명예와 권위, 부를 모두 가진 최상류층 인사였습니다. 툴러틴(Talmud)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의 세 부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Gill-c.commentaries.cmt)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고, 그의 의견은 사회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고데모의 이력서를 보십시오. 신앙의 열심, 사회적 성공, 도덕적 권위. 그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진정한 평안과 구원의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2의 헨겐베르크 주석은 이것을 통찰합니다. "바리새주의의 특징은 중생을 모르고, 오직 인간이 앞장서고 하나님은 주로 그것을 지켜보고 갚아주시는 파편적인 성결을 획득하는 데 있다."(Hengs-c.commentaries.cmt)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이 니고데모의 신앙과 같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고, 성경을 잘 알며,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는 혹시 이러한 우리의자격공로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세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니고데모는 우리에게 인간의 최선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그 모든 자격은 오히려 진정한 필요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았기에, 그가 없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대지 이. 밤의 방문: 가장 큰 두려움을 이기고 나온 영혼의 갈증 (인간적 두려움의 극복)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께 찾아왔습니다.” (v.2) 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상징입니다.

 

첫째, 이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그가 밤에 찾아온 이유는 동료들, 즉 예수를 적대하던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의 눈치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Joh 12:42-43)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잃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찾아옴은 진정한 믿음의 발로였지만, 아직은 그 믿음이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연약함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존 칼빈은 이를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칭찬을 누리려는 애정이 고위층 사람들에게는 필요가 된다"고 통찰했습니다. (Hengs-c.commentaries.cmt 요약)

 

둘째, 이는 영적인 어둠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이의 의미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 7:50, 13:30, 19:39) 헨겐베르크는 이를 깊이 있게 해석합니다. "요한이 밤의 방문을 언급한 것은 단지 그의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하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의 방식에 따르면, 이는 여전히 니고데모의 마음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상징이다." (Hengs-c.commentaries.cmt) 그는 이성적, 사회적 빛 속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깜깜한 밤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속에서되신 예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아직 밤의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음 때문에 주변의 비난과 조롱을 받을까 두려워 신앙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연약함과 고백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를 드러낼까 봐, 예수께 나아오기를 망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니고데모의 방문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밤길을 더듬어 찾아오는 영혼을 결코 외면하거나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자리에 앉아 그의 가장 깊은 필요를 헤아려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과 두려움 아래에서도 용기를 내어 찾아오는 모든 영혼을 환영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상한 심지를 끄지 않시고, 꺼져가는 불꽃을 끄지 않으시는 긍휼의 주님이십니다.

 

대지 삼. 불완전한 고백: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으나 가장 잘못된 평가 (인간 이성의 한계)

 

어둠 속에서 나온 니고데모는 예수께 자신의 신앙 고백을 내놓습니다. 그의 고백은 지극히 경건하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결론이었을지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담고 있었습니다.

 

첫째, 그의 호칭은 **‘랍비여’**였습니다. 이는 예수를나의 선생님이라 부르는 존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주(Lord)나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동료 랍비 중 가장 뛰어난 분으로, 최고의스승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인간의 영역 안에 가두어 버리는, 안전한 거리를 두는 호칭이었습니다.

 

둘째, 그의 언어는 **‘우리가 알다’**였습니다. (Pett-c.commentaries.cmt) 그는 자신의 신중한 판단을 공유하는 또 다른 그룹이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확신의 고백보다는, 일종의 학술적 결론, 안전한 집단적 합의를 내뱉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셋째, 그의 신학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표적’(signs)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표적의현상은 보았지만, 그 현상이 증거하는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요한복음 6:26에도 동일하게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오, 떡을 먹고 배루른 까닭"이라고 이 현상을 지적하십니다. 그는 예수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예수와함께계시는 것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제네바 주석은 이를 정확히 지적합니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를 옳게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고 말하기보다, 그 안에 계시다고 말했을 것이며,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 19절에서 한 것처럼 말했을 것이다." (Geneva-c.commentaries.cmt) 이것이 바로 인간 이성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역사는 인정하면서도, 그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하나님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의 신앙도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윤리적 스승, 삶의 멘토, 문제 해결사로 존중하면서도, 나의 삶의 주관자이시며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로 고백하기를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내 지식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결론 내리려 하지는 않습니까? 니고데모의 고백은 우리에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도달할 수 있는 신앙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가장 놀라운 선언으로 대답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3).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고백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오직 성령의 주권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만이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결론: 밤을 끝내시는 빛,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위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았습니다.

  1.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앙 이력서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밤의 어둠 속에서도 주님께 나아오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3.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합리적인 결론에 머물러 그리스도를 인간의 틀에 가두려 하지 말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 되심을 온전히 고백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주 예수께서 바로 이러한 니고데모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아시는 분( 2:25), 니고데모의 두려움과 오해를 모두 아시고도 그를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거듭남의 길,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선포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밤의 방문은 좌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만남 이후 점점 더 용기를 내어 공회에서 예수를 변호하였고( 7:50), 마침내 낮에, 그리고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놀라운 믿음의 행보로 이어지게 됩니다( 19:39). 그의 삶은 바로 그밤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늘 밤, 혹은 오랫동안 두려움과 불확신의 밤을 걸어온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당신의 자격이 무엇이든, 당신의 상태가 어떠든, 당신의 지금의 고백이 어떤 내용이든, 그분은 당신을 영접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이력서를 내려놓고, 당신의 모든 두려움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거듭남의 놀라운 비밀을 주시고, 당신의 인생을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유일하신 구주이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위로가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두의 심장을 감동시키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