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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과 믿음, 외면과 내면, 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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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과 믿음, 외면과 내면, 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구봉환 2021. 3. 27. 07:02

My Lord Has Garments So Wondrous Fine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87장) - Kang Min Sung (강민성)/(Piano: 황윤정) - YouTube

 

갑자기 나타난 믿음 


오늘은 공관복음서 세 곳 모두에 기록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 받던 여인의 치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각각의 본문은  마 9:18-26; 막 5:21-43; 눅 8:40-56입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그의 집으로 가던 도중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분명히 야이로가 먼저 주님께 간구했는데 갑자기 이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주님을 에워 싼 수 많은 군중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오직 주님과 이 여인만 압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려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예수께 나온 야이로도 몰랐습니다. 정말 갑자기 나타난 여인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이 여인의 등장은 소문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친다는 소문을 그녀는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5:25-28을 보면 이렇습니다.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그녀의 형편과 사정이 나옵니다. 12년 동안 모진 고통과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재산도 다 허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더 이상 버틸 기력도 없습니다. 아직 제 정신인 것이 기적일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은 곧 그녀에게 믿음이 되었습니다. 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습니다. 이미 많은 이야기와 조언을 들었고 그 말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수히 다녔지만 다 헛수고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소문은 달랐습니다. 이상하게도 그저 옷에 손만 대도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미신적이고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들었다면 비웃었을 겁니다. 드디어 그녀가 정신 줄을 놓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생각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만 주님만 아셨습니다. 오직 주님만 그 마음의 간구, 내면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말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 20:29) 


도마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도 주님께 나오기 까지 많은 난관과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회당장이므로 유대교의 지도자입니다. 예수를 신성모독을 일삼는 이단 사이비 지도자로 여기던 유대교였습니다. 그러나 딸의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는 더 이상 유대인도 회당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누가복음 8장 40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아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이유는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회당장 야이로도 왔습니다. 그도 역시 소문을 듣고 온 것입니다. 모인 무리들은 야이로에게 예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하지만 여인은 많은 무리들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무리들에게 길을 열어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야이로는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그리고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함으로써 자신의 공손하고 예의를 갖춘 태도와 자세를 예수께 보여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저 마음 속으로 다짐만 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야이로의 간청이 공기 중의 음파를 타고 소리가 났지만 내면적으로는 여인의 더욱 더 간절한 무음의 기도가 더 크게 진동했습니다. 하지만 주님만이 그 내면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야이로의 딸이 치유될 거라고 여겼지만 그러나 무리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여인의 치유를 먼저 목격했습니다.


외면의 옷, 내면의 믿음


칼빈은 마 9:20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자락만 만져도 즉시 냐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성령의 특별한 격려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억지로 일반 법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각 없이 성자들을 흉내낸답시고 놀아나는 미신의 횡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이들은 본받는 자들이 아니라 원숭이처럼 특별한 사건을 하나님의 명령 없이 모방하려 드는 자들이요, 성령의 지시 없이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는 자들이다. 

(중략)

​우리의 신앙이 각각 개별적인 사건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표준은 그대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 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 :17)고 하는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철저한 기반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은 어떤 순간적인 생각을 마치 신앙의 표본인 양 받아들이지 말라는 좋은 경고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칼빈은 여인의 태도를 의심과 믿음의 부족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러한 그녀의 믿음의 결함도 받아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칼빈은 그녀가 무리 속에 섞여 있었던 외면을 본 것입니다. 드러내지 않은 그녀의 내면을 잠시 간과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녀가 마음 속 내면에서 드리는 무언의 기도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속에 천둥처럼 진동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이 그녀의 이 행동을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주님은 외면을 보지 않으시고 내면을 보십니다. 

그녀의 일이 소문이 나자 이제 사람들은 더욱 더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려고 다툽니다. 그리고 주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려고 합니다. 외면적인 소문만 듣고 그 소문의 내면에 있는 여인의 믿음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 6:56).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새 87장)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 옷은 쓰라린 고통을 다 견디신 옷입니다. 십자가에 닿아 다 찢기고 조각 난 옷입니다. 맨 몸으로 그 고통을 다 받아내신 옷입니다. 여인의 혈루병이 낫게 하시기 위해 채찍을 맞은 옷입니다. 내 발이 죄악에 빠질 때 날 붙잡아 주시는 옷입니다. 시온성보다 더 찬란한 천성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옷입니다. 주님의 옷은 외면적으로는 고통과 상함과 찟김의 옷입니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치유와 회복과 화평의 옷입니다. 외면적으로는 십자가의 옷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영광의 옷입니다. 죽음과 공포의 옷이지만 부활과 생명의 옷입니다. 그런 옷을 나도 입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입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