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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6:48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8절)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먹었던 떡과는 다름을 말합니다. 만나를 먹은 조상들은 죽었지만 생명의 떡은 죽지 않고 영생하게 하는 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많은 무리들을 떠나가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후에도 계속 예수를 따른 자들은 12 제자를 포함하여 극히 소수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발치에 서서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었습니다. (주 1)
한편 마 4:4에 보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시험한 사탄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명백히 신명기 8:3의 인용입니다. 신명기에서도 떡은 광야의 만나와 비교됩니다. 여기서 예수는 육의 양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집착하는 태도를 경계하십니다. 이는 모리스의 말처럼 오직 육의 양식으로만 유지되는 삶은 불쌍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 2)
이어서 마 6:30-33에 보면 먹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또 나옵니다. 이번에는 비교의 대상이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그리고 들풀도 함께 언급됩니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산상수훈의 이 부분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의식주를 위하여 아무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처럼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나서 의식주를 위하여 일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직 의식주만 위해 일하는 이방인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의 차이점이라고 합니다. 신자 역시 의식주와 같은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염려와 걱정, 그리고 초조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주 3)
이 본문의 키워드는 염려(worry)입니다. 예수는 염려에 대한 가르침을 믿음과 대비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염려할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갖고 전진해야 함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앞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 하지만 초조해하고 염려하면서까지 할 일은 아닙니다. (주 4)
생명의 양식과 비교되는 육의 양식은 믿음과 염려라는 두 가지 태도를 유발합니다. 이 둘은 우선순위의 문제와 그 선택을 성도에게 요구합니다. 믿음으로 선택한 자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하며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마음 속에 염려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염려를 없애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들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염려를 없애고 믿음을 지니기 위함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믿음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참 생명이요 구주요 친구입니다. 그분께 모든 염려 다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www.youtube.com/watch?v=7ign89A1N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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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60–62 Jesus’ teaching on the “bread of life” is impossible to tolerate even for many of his disciples. The ensuing large-scale defection marks a watershed in John’s Gospel. As later will chapter 12, chapter 6 ends on a note of failure. As a result, the scope of Jesus’ followers is narrowed, so that only a believing remnant remains, which constitutes the core of the new messianic community that is gathered to be instructed by the Messiah (chs. 13–16).
Those departing are not merely followers from a distance; they are “his disciples” (6:60–61, 66). Many of them fall away, but not the Twelve (cf. 6:66, 67). “Hard” or “difficult” (σκληρός, sklēros [elsewhere in the NT only in Matt. 25:24; Acts 26:14; James 3:4; Jude 15; cf. Gen. 21:11; 42:7]) does not mean “hard to understand,” but “offensive”; note the parallel expression “Does this offend [σκανδαλίζει, skandalizei] you?” in the following verse.
Ἀκούειν (akouein, hear) means “accept,” that is, listen with a view toward obeying (cf. 5:25); αὐτοῦ (autou, it [neuter], him [masculine]) probably relates to Jesus’ message rather than Jesus himself, though ultimately the distinction is moot. Apparently, this group found it difficult to believe in one or all of the following: (1) Jesus’ heavenly origin; (2) the notion that believers’ appropriation of eternal life was contingent on Jesus’ death; (3) the terminology of “eating and drinking [Jesus’] flesh and blood.” Moreover, many had wrong motives, be it worldly materialism or political interests, or were unwilling to yield control of their lives to follow Christ (Carson 1991: 300)
Andreas J. Köstenberger, John,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4), 218.
(2)
Not on bread alone does not deny the importance of bread (in Palestine it was almost synonymous with “food”), but it does deny its exclusive importance. A life sustained by food only is a very poor life.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Leicester, England: W.B. Eerdmans; Inter-Varsity Press, 1992), 75.
(3)
Jesus is not saying that his followers may be as careless as the birds and the flowers, doing no work and simply looking to our Father to provide everything. It is a condition of our life here and now that we work for our daily bread. But there is all the difference in the world between doing this in anxiety and fear and doing it in trust in a loving Father. Jesus then utters a firm imperative, do not be anxious. He goes on to pose three questions that might be asked, one concerning food, a second with respect to drink, and a third with regard to clothing. In each case there is a deliberative subjunctive, giving expression to the kind of thing a worried person might ask, filled with concern about how his basic needs are to be supplied.
32. The first for locates the anxiety Jesus is deprecating where it belongs. The questions he has suggested are questions that the Gentiles, those outside the people of God, might well ask. Such people cannot claim to be members of the heavenly family, and it is not surprising, accordingly, that they should be anxious and ask questions like these. As they see it, they must seek the supply of these necessities by their own efforts and out of their own resources. Anxiety is natural for them. But worry should not characterize God’s children. The second for goes on to introduce the reason the disciples should not ask such questions. They have a heavenly Father, and that Father knows all their needs. Since God knows them all, there is not the slightest reason for anxiety. Perhaps we should notice that it is need of which Jesus speaks. His followers may expect their needs to be met, but not necessarily their desires.
Leon Morris, ibid. 160–161.
(4)
6:25–34 If, on the other hand, we put trust in God first, God will take care of the rest of life. This renders worry unnecessary. “Worry” is the key word of this entire section, since it occurs six times (vv. 25, 27–28, 31, 34 [2x]). The KJV’s “take no thought” is definitely misleading here. Christians must plan for the future, but they need not be anxious. Jesus illustrates his point by discussing the basic provisions of food and clothing.
Craig Blomberg, Matthew,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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