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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도서 정보는 생각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 리디북스 (ridibooks.com) 참조하세요.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원래는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거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아, 고맙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교회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베드로가 고쳤지만, 병이 나은 앉은뱅이가 봤을 때는 베드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고쳐주신 겁니다."

 

김종수, 생각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이비전, 2016, p. 86.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치유한 기사는 사도행전의 여러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가능하나 김종수 저자는 위 책에서 이 일에 대한 감사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교회하고는 많이 다르다고도 한다. 

 

  이 본문의 특이점은 베드로와 요한이 [없지만 주었다]는 점이다. 역설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역설적인 진리를 포함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역설일까? 역설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는 어감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뒤집어 보는 것이다. 현실의 세상을 세상의 논리로 보지 말고 하늘의 논리로 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려움은 극복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아니고, 죽음은 새로운 삶, 영생의 시작이므로 죽음이 아니다.

 

  본문의 역설들 역시 분명하다. 앉은뱅이는 난치의 불구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병이 들더라도 재산도 있고 지위와 권력이 있으므로 고칠 수 있었던 다른 이들은 앉은뱅이가 드렸던 것과 같은 찬송은 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단순히 역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준이 다르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럼에도 역설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 단어가 주는 임팩트가 강하기 떼문이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치유의 기적을 줄 수 있었다. 두 다리로 벌떡 일어선 앉은뱅이는 이 치유의 기적 뒤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 느껴졌으므로 찬송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역설적으로 역설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기준을 바꾸라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세상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물질의 기준에서 말씀의 기준으로, 그리고 불평과 원망의 기준에서 믿음과 감사의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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